성경 본문 참조(마태복음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9-11)
주기도문의 전체 내용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그런데 통상적으로 이 주기도문의 구조는 앞부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서술과 뒷부분의 우리의 생활에 대한 서술로 나뉘어 있다고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이나 기도문 등을 주제나 내용에 따라 나누는 것에는 많은 견해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놓고 어느 것이 옳으냐를 다루는 것은 본 글의 의도가 아닙니다.그것은 말 그대로 '견해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히려 우리는 여기에서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본질적인 문제란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의도하신 바는 분명히 그의 나라에 대한 것인데 주님이 이 중에 단지 우리의 필요을 위한 기도를 넣으셨겠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을 들으면 곧바로 이런 반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우리는 우리의 필요도 구해야 한다.어떻게 신자가 자신의 필요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옳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기도문을 조금 더 잘 이해하면,'우리의 필요를 구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주기도문에서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란 이런 것입니다.'하나님!오늘 얼마의 돈이 필요합니다',하나님 직장을 주세요','하나님 아이들 학원에 보내려면 이 정도의 수입이 필요합니다','하나님 오늘도 장사에서 필요한 수익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세요'우리가 통상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할때 떠올리는 것은 보통 이런 것들입니다.그런데 주기도문의 이 부분이 과연 이러한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일까요?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마태복음 6장 전체에 나타나는 문맥의 기조입니다. 이 이중에서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하신 말씀들과 우리가 생각하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과연 잘 맞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가"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대해 오해를 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말씀하셨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예수님이 주기도문을 말씀하신 뒤에 곧이어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은 유념해야 할 점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고 가르치신 후에 19절부터 곧바로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재물에 대한 간단한 요약의 말씀들을 이렇습니다.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후 예수님은 이런 내용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이 내용들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실은 일욜할 양식들을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은 분명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셔 놓고 , 그 뒤에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절)고 하십니다. 조금 더 강력하게 32절에서는 이것을 "다 이방이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30절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들의 백합화가 자라는 것을 보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이,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이것을 염려하는 자들을 향하여"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에 대한 정당성'을 주기도문의 이 부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하여 염려하고 그것을 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엄하게 말씀하십니다.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믿음 없는 자들의 행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고민을 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를 보면서 쉽게 '오늘 무엇이 필요합니다','이번 달 곗돈을 넣으려면 얼마가 있어야 합니다','이번 학기 아이들 등록금을 어떻게 하지요?'와 같은 기도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그 후의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 ,주님은 이런 것들을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그렇다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중"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부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점을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네가 필요한 것들도 하나님 앞에 구하면 주신다'는 점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다면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일용할 양식이 란 말 그대로 '그날 먹을 음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에 대한 기도라면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시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하나님 !우리가 쓸 것을 풍족히 채워 주옵소서!'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기도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우리가 이 땅에서 쓸 것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고 있으니까요.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생활에 필요한 제반 모든 것을 구하라'고 가르치시는 대신에 '일용할'즉 ,그날 먹을 음식,영어로 하면『Daily Bread』 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날마다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힌트를 얻으신 분이 있겠습니다만,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 표현이 구약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살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셨을 때,그 말은 구약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16장에 나옵니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물론,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였고 ,신약은 헬라어로 쓰였기 때문에,똑 같은 표현인지 아닌지는 비교하기가 곤란하지만,의미상으로 볼 때 주님이 말씀하신 '일용할'양식이란 구약적 의미에서 분명히 '만나'를 가리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하늘로 부터'직접 양식을 받았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은 이 양식을 주실 때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신 다음,'먹을 만큼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만나는 매우 엄격하게 당일의 분량만을 거두도록 지시되었습니다.모세는 이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도록"(19절)했습니다. 모세의 말을 청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음날까지 남겨두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20절)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세가 노했습니다.(21절)즉 당일에 거두어서 당일에만 먹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 만나였습니다.이 만나를 주시겠다는 약속에 바로 이 표현이 나옵니다."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하나님이 만나를 '일용할 것'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우리는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이유를 신명기 말씀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이 신명기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 즉,일용할 것으로 먹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먹을 것 즉,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에 대해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보여 줍니다.신명기는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즉, 만나는 겉으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한 양식이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이 밥을 먹으나,먹는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왜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을'하늘에서 내리는'방식으로 주셨을까요?왜 하나님은 정기적으로 약대를 몬 상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문하게 하거나,그들 가운데 양떼가 풍족하게 새끼들을 낳아서 그것을 통해 먹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왜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동안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시지 않고,굳이 하늘에서 양식이 내리는 방식으로 그들을 먹이셨을까요?
신명기는 이 모든 것이 '먹는 것을 통해 그 먹이시는 주체가 하늘에 계신 분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말합니다.즉, 그들은 매일이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아!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그들은 사실 떡을 먹으나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사는 것임'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에 이 구절을 인용하신 이유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주님은 40일을 금식하신 후 굶주리셨습니다.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하지만 주님은 이 맥란 안에서 사탄을 물리치십니다.'내가 육체의 굶주림으로 인해 유혹받으나,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 .물러가라!'
'일용할'양식을 주신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매일'하늘로 부터 내리는 양식을 거둠으로써 하나님이 매일 자신들을 먹이고 계심을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그래서 양식을 한꺼번에 거두어 비축하는 일은 금지되었습니다.그들은 아침마다 땅을 덮은 만나를 거두면서 ,그들을 매일 먹이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이 맥란 안에 있습니다.주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를 지시하셨을 때의 의도는 무엇입니까?너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너희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주마.'이것이었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의 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먹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하나님!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통해,우리를 날마다 먹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그러므로 이 기도는 주기도문 전체의 내용에 상충되지 않습니다.주기도문 전체의 내용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이해할 때,'일용할 양식을 조옵소서'라는 기도 역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이렇게 기도할때,예수님이 뒤에 가르치신 재물에 대한 가르침도 이해가 됩니다.참으로!'먹을 것과 입을 것만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우리는 그것을 구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오히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통해'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도 나를 먹이고 입히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이것이야말로 진정 마태복음 6장 마지막 구절의 의미입니다.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칼빈은 주석에서 이 부분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지상 생활의 의식주 문제를 먼저 들고 나오시는 것은 우리를 이런 기초적인 것에서 부터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가려는 뜻에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일시적인 배불림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의 구원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처럼(여겨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모든 혜택의 유일한 출처로 여기며 더없이 하찮은 문제에서도 아버지로서의 선하심에 대한 여러 증거가 나타난다는 점,더 나아가 그분은 육신의 필요 사항까지도 생각해 주신다는 점을 발견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의 산앙에 대한 진정한 시금석이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돌보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